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와타나베 히사노부 (문단 편집) == 학창~선수 시절 == [[파일:external/i.ebayimg.com/!Bdo02WwB2k~$(KGrHqYOKjYEq5UtEI26BK5zoJpRNw~~_35.jpg|set_id=8800005007]] 1994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 표지모델이 된 와타나베.[* 왜 일본프로야구 사진이 미국 스포츠 전문지 표지에 실렸나면, 이 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선수노조 파업 사태]]로 인해 이해부터 시행하기로 한(결국 95년부터 시행) [[디비전 시리즈]], [[챔피언십 시리즈]], [[월드시리즈]] 등 포스트시즌 일정이 '''모조리 다 취소되어 버려서''' 미국 야구팬들이 볼 수 있는 [[가을야구]]라고는 [[일본시리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 경기가 중계되기도 했을 정도.] 중학교 때부터 무려 시속 140km대의 강속구를 던지며 주목을 받았고, 그후 마에바시 공고에 입학해서[* 다만 와타나베 본인은 본래 당대의 야구 명문고로 소문났던 키류 고교로 입학하려 했고, 입학 수험공부를 위해 가정교사까지 고용했으나.. 정작 본인이 '''공부를 매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3일 만에 입시를 포기해 버렸다'''] 야구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러나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코시엔]] 경험은 1학년 때 하계 코시엔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1차전에서 그해 하계 준우승팀 교토 상고에게 끝내기로 패했다. 그후 3학년 때 지역예선 결승까지 가서 코시엔 문턱까지 갔으나, 이때도 상대인 오타 공고에게 끝내기 패하며 결국 코시엔을 다시 밟진 못했다. 그후, 1983년 드래프트에서 세이부의 1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한다. 다만 세이부에선 본래 타카노 히카루[* 4팀의 지명을 받고 추첨으로 야쿠르트에 입단했으나, 80년대 중반에 주축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활약한 것 외엔 특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고, 결국 통산 51승 55패 13세이브, 방어율 4.08, 642탈삼진의 성적을 기록하고 1994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은퇴했다.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1995~98년까지 2군 투수코치로 일했고, 이후 [[대만 프로야구]] [[싼상 타이거스]]에서 1999년 투수코치로 부임했으나 1년 만에 팀이 해체되면서 무직이 되었는데, 이후 [[정신질환]]이 발병하며 그 후유증으로 결국 2000년 11월 5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여담으로 [[대한민국]]과도 작은 인연이 있었는데 자살 직전인 2000년 [[현대 유니콘스]]의 스프링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은 적이 있었다.]라는 [[투수]]를 지명하려고 했으나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한큐 브레이브스]],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 3팀과의 치열한 추첨승부 끝에 야쿠르트에게 교섭권을 넘겨주면서 대체 1순위로 [[츠지 하츠히코]]를 지명하려 했으나, 결국 꿩 대신 닭으로 와타나베를 지명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가 와타나베가 남아있다며 영입을 주장하면서 급하게 와타나베를 대체 1순위로 지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츠지 하츠히코]]는 세이부에 2위로 지명되었다. 신인 때부터 1군에 정착하고 속구와 포크볼을 무기삼아 3년차인 1986년 시즌 최다승과 최다탈삼진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1988년과 1990년에도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히가시오 오사무]], [[쿠도 키미야스]], [[곽태원]][* 대만 출신의 우완 강속구 투수, 동양의 [[놀란 라이언]],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일본에서는 이름 곽태원을 일본식으로 읽은 카쿠 타이겐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80년대 후반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3명의 대만인 투수 곽태원(카쿠 타이겐, 세이부), 곽원치([[카쿠 겐지]], 주니치), 장승웅(소 카츠오, 롯데)는 대만과 일본 야구계에서 '이곽일장'으로 불렸다. 이들 중 곽원치와 장승웅은 나중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이시이 타케히로 등과 함께 선발 마운드를 지키며 세이부 왕조 시대를 지탱했다. 치밀한 제구력보다 강속구와 힘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의 투수였으며, 탈삼진을 많이 뺏어냈지만 반대로 피안타와 피홈런도 많이 허용했다. 이런 스타일의 투수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노쇠화로 인한 구위의 약화가 나타난 이후에도 전성기 시절의 투구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선배 투수이자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히가시오 오사무]]가 강속구가 통할 때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주라는 충고를 했지만 성공에 이르진 못했다. 1997년 시즌을 마치고 세이부에서 방출 된 후, 노무라의 ID야구를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다. 철지난 것으로 여겨지던 노장 선수들을 잘 활용한다고 해서 '노무라 재생 공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무라 감독 아래에서 부활을 기대했지만, 성적의 향상을 이뤄내지 못하고 시즌 후 전력외통보를 받았다.[* 반면 세이부에서 먼저 이적한 [[츠지 하츠히코]]의 경우 1996년에 타율 0.333을 기록해 노무라 재생공장의 훌륭한 사례로 남았다.] 이 이후 현역 은퇴를 결정하고, 야구 해설자 계약을 맺었지만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의 추천에 의해 지도자 공부를 위해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 1997~2002년까지 [[대만 프로야구 리그]]와는 별개로 존재했던 야구 리그. 약칭 '''대만 대연맹'''. 리그 개시 초기엔 당시 [[검은 독수리 사건]] 때문에 [[대만 프로야구 리그]]의 인기가 개발살난 상태라 상대적 이익을 얻으며 어느정도 잘나갔으나, 결국 갈수록 인기가 줄어들면서 2002년을 끝으로 중단되고 CPBL에 합병된다.] 투수 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곤란으로 인해 한때 세이부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당시 대만프로야구계에서 기술고문을 맡고 있던 [[곽태원]](카쿠 타이겐)에게 통역사를 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와타나베가) 스스로 던져 몸으로 가르치면 좋겠다" 고 조언을 받고 급히 선수 겸 코치로 현역에 복귀했다. 완급조절을 구사한 투구의 결과 입단 1년차에 18승을 거두며 다승, 탈삼진, 평균 자책점 부문 3관왕을 기록하고, 이듬해에도 15승 8패, 방어율 2점대를 기록하며 에이스로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체중 관리 실패 및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로 인한 노쇠화를 극복하지 못하며 2001년엔 2승 7패 4세이브, 방어율 3점대로 부진했고, 이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와타나베가 은퇴한 이듬해인 2002년, 대만 직업야구 대연맹이 중단되면서 자난 루카는 해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